미국 수학계에서 J. J. Sylvester의 역할에 관한 연구
Sang-Gu Lee (Sungkyunkwan Univ.)
cowork with Yoonmee Ham(Kyonggi Univ.)
sglee@skku.edu
Spring Conference of Korean Mathematical Society
April 22, 2005, Dankook University, Cheonan
Abstract
We study the development of American Mathematics between 1876-1900 and the first Mathematical reserch journal of USA, and analyze the role of the America's first Jewish Math Prof. J. J. Sylvester in that period. This reserch shows several interesting resembrance and distinctions in Korean Math Society and AMS. We study the meaning of J. J. Sylvester's role in the sense of Korean mathematical society's perspective.
Key words : J.J. Sylvester, American Math Society, American Journal of Math;
본 발표내용은 한국수학사학회 Workshop에서
지난 2월 처음 소개하고,
최근 한국수학교육학회
소식지에 기고한 내용을 보강하였습니다.
1. 서문
영국, 아일랜드와 짧은 미국 버지니아대학 수학과 교수직, 보험회사 계리인, 오랜 변호사 생활을 거쳐, 영국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55세에 정년을 한 유태계 영국 수학자 James Joseph Sylvester의 생애를 분석한다. 그는 62세의 나이로 1876년 미국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인 Johns Hopkins 대학에서 초대 수학과장으로 초빙되어 연구 인력을 배출하고 미국 최초의 수학연구저널을 발간하며 미국에 현대수학의 연구 여건을 마련 해 준다. 우리는 Sylvester가 1876-1900년 사이 낙후된 미국 수학을 당시 유럽 중심의 수학계 주류에 진입시키는 과정에서 끼친 영향이 한국에서 갖는 의미를 생각한다.
2. James Joseph Sylvester
James Joseph Sylvester(1814.9.3~1897.3.15)는 런던 출생으로1828년부터 15세의 나이로 런던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어린나이의
대학생활 부적응을 발견한 가족의 권유로 5개월 만에 다시 Liverpool Royal Institution 부속학교로 돌아갔다가, 1831년 7월 다시 St. John's College, Cambridge에 입학하였다. 대학생활 중에는 1837년 Mathematical Tripos (수학경시대회)에서 2nd Wrangler라는 영예를 받을 정도로 수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유태인인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졸업을 앞두고 영국정교회의 선서를 거부한 이유로 졸업을 못하고, 1841년 Trinity College, Dublin에서 바로 석사(碩士) 학위를 받았다. 1841년 미국으로 건너가 버지니아대학교의 수학과 교수가 되었으나, 부임한지 3개월 만의 어느 수업시간에 신문을 읽고 있는 Ballard라는 학생을 훈계하며 지팡이로 때려 학생이 기절하자, 그 학생이 죽은 줄로 알고 짐을 싸서 영국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AB, p.81]. 사실은
버지니아대학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이 학생을 퇴학시키라는 실베스터의 요구를 학교가 받아들이지 않자, 바로 버지니아를 떠났다고 한다[B]. 다시 London으로 돌아와 1845년부터 ‘Equity and Law Life Assurance Company’라는 생명보험회사에 들어가 계리인으로 일하면서, 1846년 법과대학원에 들어가 변호사 자격도 얻었으며 10년간 위의 보험회사에 근무하였다. 1850년 행렬식에 대한 기념비적인 결과와 함께 오늘날 대수적 불변식론이라 불리는 아름답고 독창적인 연구들을 쏟아내며 연구력을 인정받았다. 이 때 변호사이며 수학자인 Arthur Cayley와 알게 되어, 10년간의 수학 공백기를 끝내고 다시 수학 세계로 되돌아와 케일리와 함께 ‘대수적 불변식론’을 연구하였고, 그 결과 ‘행렬(Matrix, 行列)과 대수적 불변식의 기초 이론을 확립’하고 우리에게 행렬대수 연구의 서곡을 마련하여 주었다[F, p.66]. Sylvester는 1851년 개의 계수들의 배열에 행렬(matrix), 즉
(정사각) 행렬이라고 이름을 주었다. 행렬(MATRIX)이라는 말은 자궁(womb)이라는 말의 Latin어 단어로서 이것은 위의 계수들의 배열의 행(row) 또는 열(column)들이 행렬식을 배태해 낸다는 것을 고려하여 이름붙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첨자를 간편하게 섞어 쓰면서 현재 쓰는 행렬의 표기법
로 발전한 것이다. 또한 그는 Minor(소행렬)라는 용어도 이 때 소개하였다. 1855년 영국 Royal Military Academy (Woolrich)교수가 되었으나
대학원이 없는 상태에서 갈등도 있었으며, 여러 이유로 1870년에 영국에서 55세 이상의 민간인은 사관학교 교관을 할 수 없다는 규칙을
근거하여 Sylvester는 16년간 봉직하던 영국의 Royal Military Academy를 타의로 떠나 연금으로 생활을 하였다[PR]. Sylvester는 그 후 5년 동안 무직 상태로 런던에서 살면서 꾸준히 수학연구를 하며 시도 쓰면서 새로운 경력을 준비하였다. 1875년 초 60세인 그는 런던 신문에 난 호주의 Melbourne 대학의 교수직 구인 광고를 보고 친구인 Arthur Cayley에게 런던에서 연금이나 받으면서 이렇게 사느니 지구 반대편인 그곳에 가서라도 계속 수학연구를 하고 싶다고 전한 편지가 얼마 전 공개되었다[P]. 그는 60세에도 아직 이루지 못한 수학에 대한 자신만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1876년 미국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을 목표로 ‘미래의 연구자를 양성하고 교수의 높은 연구력을 유지한다’는 두 가지 목표를 내세우고 Johns Hopkins University가 설립되어 수학과의 초대 학과장을 물색하고 있었다. 1875년 여름 실베스터는 신문광고를 보고 초대 총장 예정자에게 편지를 써서 연구중심 대학을 추구하는 귀교 수학과의 학과장직에 관심이 있다는 의사를 표명한다.
사실 미국에서 최초로 새로운 연구중심대학을 설립하려는 의욕에 찬 총장에게 61세의 나이에 그것도 1870년 이후에는 은퇴하여 눈에 띄는 연구력을 보이지 않은 Sylvester가 미국에 와서 1860년대에 보여주던 연구력을 다시 회복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때 Hamilton의 quaternion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Linear Associative Algebra"라는 독창적인 연구를 한 하버드대의 Benjamin Peirce의 추천서가 접수되고, 런던을 방문하여 직접 인터뷰를 한 Gilman총장은 1875년에 Sylvester를 교수로 임용하기로 결정하였으나, Sylvester는 1875년 12월 17일 갑자기 학교 재단이사회에 편지를 써서 “if the $5,000 salary therein named be understood to mean gold and if a house and the club fees be attached to [his] appointment” 할 경우에만 부임하겠다고 조건을 건다. 수차례의 전보와 편지 그리고 적어도 한번의 부임 의사 철회 편지의 사연을 거친 후 마침내 순금 가치로 년 $5,000의 급여와 $1,000의 주택임대료 등을 지불하기로 합의하고 1876년 3월 공식적으로 초대 학과장으로 Sylvester를 임용되어, 1876년 봄에 대서양을 건너 부임한다. <Johns Hopkins 대학 (Photo by SGLee)>
비로소 그는 19세기 후반 수학 후진국인 미국에서 마침내 대학원생을 지도하는 기회를 갖고 수학을 연구하는 방법을 전수하며 열심히 학생을 지도한다. 그 후 미국에서 7년 반 동안 역동적인 본인의 역할을 정리하고 1883년 12월 영국으로 돌아온 Sylvester는 마침내 1884년에 어렵게 70세가 넘어서 Oxford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고 그곳에서 정년을 맞는다.
본 원고에서는 위와 같이 알려진 James Joseph Sylvester의 19세기 말 미국수학계에서의 역할을 심도있게 소개하고자 한다. 1996년 AMS Notice 6월 호에서 당시 미국 수학회 사무총장인 John Ewing은 지난 100년의 미국수학회를 회고하였다[E]. 이 내용을 보며 느낀 점은 우선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후 미국 수학계의 100년 전과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후 한국 현대수학계의 초창기와 너무도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둘째는 미국에서의 최초의 연구 저널은 유태계 영국인인 Sylvester가 만든 것이며 그의 역할에 대하여 매우 인색하게 소개하였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 수학자에 의한 최초의 수학 연구저널인 “Transactions”이 1900년 1월 창간호를 내고 그 후 지난 100년간 미국의 수학은 크게 발전하여 100년 후인 21세기 현재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국력은 물론 실용과학과 이론과학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수학에서도 현재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런 동력이 100년 전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닐 것이고 100년 전을 전후하여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하였는데 이 계기가 행렬을 소개한 선형대수학자 정도로 알던 Sylvester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당시 Sylvester의 역할에 대하여 얘기하고 우리가 배울 점을 찾아내고자 한다.
3. Sylvester와 Johns Hopkins대학
1876 영국에서 적당한 직장이 없어서 방황하던 수학자가 61세의 나이에 결심을 하고 당시 문화적으로 또 수학에서 연구저널하나 없는 후진국인 미국에 처음으로 연구중심대학을 만든다는 소리를 듣고 스스로 응모하여 신설학교의 수학과 초대 학과장으로 부임하여 7년 반 동안 어떻게 유럽의 선진 수학교육 시스템과 연구방법을 미국에 전수하였으며 미국 최초의 수학 연구저널을 창간하고 1876년에서 1900년 사이 낙후된 초창기의 미국수학계에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에 대하여 소개한다. 이를 위하여 19세기 말의 미국으로 돌아가서 당시 Sylvester가 7년 반 동안 한 일을 사실적으로 확인하며 시작하자.
1876년 Sylvester가 학과장으로 처음 한 일은 강사를 구한 것이다. 그는 Teaching Associate(강사)로 자신을 추천한 Benjamin Peirce의 제자인 William E. Byerly(1873년 하바드 PhD)와 William E. Story (1875년 Leipzig PhD, Carl Neumann과 Felix Klein의 PhD, 1876년 당시 Harvard Tutor)를 고용하고 8명의 대학원생과 7명의 학부생 총 15명의 학생으로 1876년 가을 수학과 강의가 시작 되었다. 첫 해에는 두 강사가 학부생을 가르치고 Sylvester는 대학원 과목으로 수학세미나에 보태 Determinant 이론과 현대대수학에 대하여 지도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강좌의 수도 늘어나고 학생수도 15명에서 1883-1884년 사이에는 35명으로 늘었다. 1882년 봄 학기에는 Arthur Cayley가 방문교수로 머물며 “대수기하와 아벨 및 세타함수“ 강의를 하였다. 전체적으로 당시 이 대학에서 지도한 수학적 내용은 Harvard를 포함한 기존의 다른 대학의 강의 수준을 넘어 현재 진행형의 연구 내용을 포함하였다. Sylvester 자신도 그의 강좌에서 본인의 연구 내용을 그대로 강의하였다. 한 예로 Sylvester 본인 경우 정수론 강좌를 5학기 연속하여 개설하고 지도하였다. 한국인 중 Johns Hopkins대학에서 정수론으로 학위를 받은 사람이 많은 것도 Sylvester가 초창기에 정수론 강의를 집중적으로 개설한 역사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PR, p.76].
1881-1883년 사이에 Fellowship을 받는 조교였고, 후에 Hobart College의 교수가 된 제자 William Durfee의 말에 의하면 ‘Sylvester의 강의는 교재를 가지고 6-8주 정도는 따라가다가 질문이 나오고 토론이 진행되며 새로운 흥미로운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따라가며 새로운 분야에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미 발표된 다른 사람의 연구 결과를 읽고 따라가기 보다는 강의 중에 유도되는 본인의 새 문제에 집중하였으며 그런 경우 그의 강의의 대부분은 자신이 하루나 이틀 전에 생각해 낸 아이디어로 채워졌다고 한다. 이런 방식의 강의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로부터 불만도 많이 있었지만, 장점으로는 학생이 접하는 내용과 증명법이 모두 새로운 내용이었으므로, 그가 설명한 내용에서 바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Sylvester는 ‘수학은 교재에 있는 정적이고 화석화된 지식이 아니라 동적이고 성장하는 생명체와 같은 것이므로 학생들이 그 성장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한 듯 했다’고 제자들은 얘기했다[PR, p.81].
대학원이 내실을 갖추어 가면서 학생들은 대학원세미나를 통해 수학과 서가에서 학습한 내용을 같이 발표하면서 아이디어를 나누었다. Sylvester는 이 결과들을 정규 Mathematical Seminary전에 laboratory report로 준비하도록 지도하여 이 자료가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Circulars’라는 학생잡지 성격으로 발전하였으며, 자연스레 그 대학이 발간하게 될 미국 최초의 수학연구저널인 ‘American Journal of Mathematics’가 이 연구 결과의 일부에 빛을 비추어 주게 된다.
1875년 총장 Gilman은 연구중심대학에서 연구를 한다면 그 결과를 발표하는 저널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1855년 창간되어 이미 권위를 인정받는 더구나 Sylvester가 편집진으로 봉사했던 영국의 저널 ‘Quarterly Journal of Pure and Applied Mathematics’를 생각하고 이 잡지를 Baltimore로 옮겨오는 가능성을 확인해보았으나 거절당한다. 그러나 Gilman은 포기하지 않고 Sylvester에게 전문수학저널의 출판을 요구한다. 1876년 11월 8일 Sylvester와 Story는 이전 미국에서 시도되었던 유사한 노력이 실패한 이유로 발표 가능한 수학 논문의 양과 질은 물론 지속적인 출판에 필요한 예산의 부족이라는 것을 알고 이들은 논문의 질과 양은 외국의 선진국 유럽의 저명한 수학자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안정적인 예산의 확보를 위해 Johns Hopkins 대학 재단에 기금 확보를 강력히 요청한다. 결국 대학재단은 1877년 6월 Johns Hopkins대학의 최초 학술잡지이자 미국 최초의 수학연구저널‘American Journal of Mathematics’의 출판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초대 편집장으로 Sylvester가 추대된다.
그러나 Sylvester는 재정 문제와 잡다한 편집에 관련된 일에 시간을 많이 할애할 생각은 없었던 듯 하다. 따라서 William Story가 "associate editor in charge"로 직면한 현안을 해결해 간다. 예산 문제는 대학이 매년 Baltimore의 John Murphy & Co. 에 출판비의 20% 정도인 $500을 지원하는 것으로 합의를 본다. 1878년에서 1884년 사이에 Sylvester와 Story의 책임 아래 저널은 국내외의 관심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이 기간 동안 저널의 절반 정도는 Hopkins 구성원의 논문이 차지하고, 나머지 절반은 미국과 세계 수준의 수학자를 포함하는 외국의 투고자들의 논문으로 채워졌다. 이 저널의 발간으로 Hopkins의 수학과는 단지 미국인 수학자를 배출하는데 그치지 않고 미국에서도 수학적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센터로 자리 하였다.
Hopkins에서의 수학 연구는 Sylvester의 불변이론, Story의 기하학이 있었으며, 1878-1883년 사이에는 Cayley의 연구에 힘입어 Fabian Franklin을 필두로 불변이론 연구를 순수한 조합론 문제로 발전시켰다. 1882년 Cayley가 방문하는
기간에 Sylvester는 현재 행렬이론이라 불리는 내용을 강의하며 공동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래서 1883년 여름 영국을 방문한 Sylvester는 행렬대수 연구에 몰두하여, 행렬과 사원수 사이의 관계를 발견하고, 특성방정식의 주요 성질을 찾았으며, 최소다항식의 중요성을 밝혔다. 이 연구로 사원수의 행렬표현과 가환행렬의 성질 및 특성다항식과 최소다항식사이의 차이를 규명하였다. 그런데 이즈음 Oxford에서 수학과에 신설된 Savilian Professorship 자리에 교수를 뽑자 영국으로 돌아가고
픈 생각에 자신의 후임으로 당시 Leipzig대의 젊은 Felix Klein교수를 추천하고 1883년 12월에 급히 영국으로 돌아간다. Leipzig대의 Felix Klein은 Sylvester의 후임으로 Hopkins에서의 신임 학과장직을 받아들일 의사를 보였으나, 임금에서 연봉 $5,000과 이사비용 $1,000이라는 조건이 연봉 $6,000 이라는 전임학과장의 대우보다 못하고, 독일 대학이 보통 제공하는 가족에 대한 처우에 대해 보장을 요구한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임용을 사양한다. 따라서 총장은 후임 학과장으로 수리천문학자 Simon Newcomb교수를 임명한다. 그러나 그의 학과장으로서의 역량은 전임자에 비해 턱없이 모자랐고, 그에 따라 학과가 어려움에 빠지자 Story가 본인의 학위 논문을 부분적으로 지도한 Felix Klein과 구상하던 방향으로 학과를 개혁한다. 기록에
의하면 수학과가 신설되었을 때부터 Sylvester는 대수학을, Story는 기하학을 가르치며 이 후 많은 박사를 배출 하였다. 그러나 Story도 Hopkins에서는 단 한명의 박사 Henry Taber를 1888년에 배출하고, 1889년 신설된 새로운 연구중심대학인 Clark대학의 초대 학과장으로 옮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18명의 박사를 배출한다. 특히 Story의 Clark대학
제자 중 한 명이 Solomon Lefschetz로 그는 졸업 후 Princeton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하며 많은 제자를 배출한다.
Fermat의 마지막 문제를 해결한 Andrew Wiles가 근무하는 Princeton대학 고등연구소(IAS)가 대수기하학에 강한 것도 이런 미국 초창기 수학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 미국의 10여개 대학에 박사과정이 있었지만, 연구 수준의 교육이 가능했던 곳은 없었다[PR]. Sylvester 자신은 훌륭한 새 연구문제를 소개하였고, 학생에게 적절하게 해결방향을 지도 하였지만, 자신의 전문 지식과 강한 수학적 배경 모두를 전수하지는 못했으며 지도한 학생이 독립된 연구자로 실제 연구 문제를 찾는 방법은 전수하지 못한 채 떠난 셈으로, 다른 누구도 그 빈 자리를 채워주지 못했다. 연구 방향을 잃은 일부 제자는 대신 교육과 행정에서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의욕을 가진 나머지 제자는 유럽으로 눈을 돌렸다. Johns Hopkins대학 수학과가 이때 Sylvester가 추천한 Felix Klein과의 연봉 협상을 잘 마무리 하여 후임 학과장으로 맞았다면 미국의 수학사는 다르게 쓰였을 것이다. 이제
Story 마저 떠난 Johns Hopkins대학 수학과는 구심점을 잃고 추락한다[PR]. 그러나 이런 혼란기에 들어서기 이전에도 Sylvester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유럽의 학계를 접할 기회를 권장하였다. 본인이 영국으로 떠난 후에는 학생들에게 나이 든 자신 보다 Leipzig대학의 젊은 Felix Klein교수를 지도교수로
추천해 주는 역할을 하였고, Klein은 직접 미국에 가서 미국학생을 지도하지
는 않았지만 Johns Hopkins대학의 졸업생을 받아 독일에서 지도하기 시작하였으며, 1886년 괴팅겐대로 옮기면서 Leipzig대학 수학과 후임으로 그의 친구 Sophus Lie를 초빙하고, Lie도 그 후 10여 년 동안 6명의 미국인 학생을 Leipzig대학에서 지도하였다. Klein은 괴팅겐대학으로 옮기면서 C. L. Lindemann과 David Hilbert로 이어지는 학통을 만들면서 (http://genealogy.math.ndsu.nodak.edu/
html/id.phtml?id=7404), 괴팅겐대학을 19세기 말부터 제 2차 세계대전까지 세계 최고 수준의 수학자가 모이는 수학의 메카로 만들었다.
또 미국에는 유학 온 Harvard, Princeton, Wesleyan 졸업생을 지도하여 명문대학의 박사학위를 수여하였고, 이들은 귀국하면서 어려움 없이 다시 미국의 명문 대학에 자리를 잡고 활발한 연구 및 교육 활동을 하였다. 이 이외에도 수많은 미국의 수학자가 괴팅겐대학을 포함한 유럽을 방문하여 박사 후 과정과 같은 연수 기회를 가지고 귀국하면서 미국은 20세기를 맞게 된 것이다. 즉, 20세기를 맞이하며 충분한 유학파 수학교수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오늘의 미국 수학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이다.
4. Sylvester 이후의 미국 수학계
Sylvester의 영향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미국 학생은 9명이라고 한다[PR]. Klein이 Leipzig대학에서 만난 첫 번째 Johns Hopkins대 졸업생은 Sylvester에게 1880년에 박사를 받고 바로 괴팅겐으로 연수 온 Irving Stringham이었다. 그는 귀국 후 Hopkins에 근무하다 Michigan대에서 교수가 되었다. Klein은 1884년 여름 Leipzig대학에서 두 명의 미국인 학생을 더 만난다. 그 중 한 명이 하버드 졸업생 Frank Cole이다. 그는 1년간 배우고 졸업은 안하고 1885년 돌아갔는데 귀국 후 하루 10시간 씩 6개월 동안 가지고 간 문제에 도전하여도 안 풀리자, Klein에게 좀 더 쉬운 문제를 알려 달라고 하여 그 문제를 풀고 1886년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논문 제목은 “A Contribution to the Theory of the General Equation of the Sixth Degree”로 American Journal of Mathematics V.8 (1886):265-286에 실렸다. 그는 후에 컬럼비아대학에서 자리를 잡고 단 한명의 박사 학생을 배출 하였지만, 그 제자가 배출한 박사와 그들의 제자가 확인된 수만 495명에 이른다. (http://genealogy.math.ndsu.nodak.edu/ html/id.phtml?id=7611) Cole이 Harvard에서 가르친 학생 중 한 명이 William Osgood인데 Osgood의 기억에 의하면 Harvard에서의 대학원교육은 Cole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한다[PR].
Klein이 1885년 괴팅겐대학으로 옮긴 후 그에게 배우려고 미국으로부터 오는 유학생의 수는 점차 증가한다. 그 첫 번째가 1886년 여름에 온 Harvard 석사 Mellon Haskell이다. 그는 귀국하여 버클리대학에서 자리를 잡고 많은 박사 제자를 배출하였다. 이어서 1887년 가을 Cole에게 배운 Harvard 석사 William Osgood가 괴팅겐에 와서 1890 Max Noether아래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Harvard대에서 박사를 배출하며 연구 여건을 만든다. 1888년 마찬가지로 Harvard 졸업생인 Maxim Bocher는 Klein 아래서 1891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후에 미국수학회의 'Transaction' 발간에 크게 기여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Felix Klein은 본인이 배출한 제자 56명을 포함하여, 특히 미국에서 활동한 제자들의 왕성한 연구와 학생지도에 힘입어 자신의 제자들이 배출한 박사들의 수가 2005년 현재 확인된 수만 해도 저자를 포함하여 20,000명을 넘었다. http://matrix.skku.ac.kr/sglee/MathAncestors-sglee.htm
Felix Klein이 배출한 다른 중요한 수학자가 3명의 Wesleyan대학 졸업생으로 (그 대학의 수학과 교수이며 미국수학회 부회장을 역임한 John Monroe Van Vleck은 그의 아들 Edward Burr Van Vleck을 포함하여 3명의 Wesleyan대학 제자를 Klein의 제자로 유학을 보낸다.) 이들 중 한명은 MIT의 교수가 되고 또 한 명은 미국수학회의 9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Edward Burr Van Vleck은 Wisconsin대학의 교수가 되어 미국수학회의 12대 회장을 역임하며 미국수학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에 보태어 Edward Burr Van Vleck교수의 아들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Jon Van Vleck이다. 그의 기여에 힘입어 Wisconsin대 수학과 건물이 Van Vleck Hall로 불린다. 이들은 각기 본인의 학교의 연구를 이끈다. 이어서 미시간대, 코넬대, Clark 대, Yale대 등에도 한 단계 높은 대학원교육을 통한 연구수준의 향상이 이루어진다.
<Wisconsin대; 사진 중앙에 W. Rudin, 1998>
<Wisconsin대; Van Vleck Hall, 1998>
이와 같이 Sylvester를 통하여 영향을 받은 미국의 젊은 수학도들이 Felix Klein을 통해 유럽에서 학위를 받고 그들과 함께 미국에서 자체적으로 배출한 수학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1887년 Columbia College의 대학원 2학년이었던 Thomas Fiske에게 지도교수는 무슨 이유에선가 6개월간 외국을 다녀오라고 강권하였다. 그는 영국의 Cambridge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뉴욕으로 돌아오며 인근 지역의 수학교수를 회원으로 하는 수학회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구상을 하였다. 마침내 1890년 겨울 23명의 회원을 갖는 New York Mathematical Society를 구성하였고, 1881년 수학 관련 소식과 article을 모두 담는 현재의 AMS Notice와 유사한 'Bulletin'을 발간하였다. Fiske는 몇 달 동안 회원을 늘리는 적극적인 노력으로 23명의 회원을 200명으로 늘렸다. 1893년 당시 세계 수학의 권위자가 된 Felix Klein이 시카고에서 열린 Columbian Exposition이 주최한 Mathematics Congress에 참석하며 미국수학계는 일대 전환을 맞게 된다. 이 때 이미 Johns Hopkins대학과 Clark대학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시카고에 록펠러 재단의 막대한 지원으로 미국의 세 번 째 연구 중심대학으로 1890년 Chicago대학이 설립되어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받고 있었다. 1892년 32세의 나이로 Northwestern 대학에 근무하다 시카고 대학의 초대 수학과장으로 취임한 E. H. (Eliakim Hastings) Moore는 바로 Felix Klein의 두 제자인 Bolza와 Maschke를 교수로 스카우트한다. 1883년 시카고 Mathematics Congress를 주최한 것을 계기로 Moore와 시카고대학 수학과는 Host가 되었다. 이어서 1894년 미국수학자들의 다양한 모임은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AMS)라는 하나의 단체로 새롭게 탄생한다[D]. Moore는 AMS의 Chicago지부를 설립하여 초대회장을 역임하며 AMS의 부회장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Moore는 6년 후 1900년 38세의 나이로 미국수학회 회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특히 시카고 대학은 1890-1915 사이의 미국 수학 초창기에 60여명의 박사를 배출하며 미국 수학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다. 한 조사에 의하면 1990년 현재 미국에서 배출하는 수학박사의 1/3 정도가 E. H. Moore의 박사제자의 박사제자들이라는 보고가 있었다. 한 번 더 강조한다면 E. H. Moore의 역할로 그가 미국 세 번 째 연구중심 대학인 시카고대 수학과를 통하여 배출한 R.L. Moore를 포함하여 31명의 자신의 박사 제자와 그 제자들이 배출한 박사는 온라인상으로 에서 현재 확인 된 수만도 총 8,763명이다[G]. 이 숫자는 미국 수학계 더 나아가 세계수학계에 큰 의미를 주고 있다. 그러나 아직 미국에는 Sylvester에 의해 창간한 Johns Hopkins대학의 ‘American Journal of Mathematics’이외의 전문 수학저널은 존재하지 않았다.
1890년 겨울 Columbia College박사인 Thomas Fiske의 노력으로 만든 New York Mathematical Society와 1885년 Yale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한 후 바로 괴팅겐과 베를린을 방문하며 충분히 자극을 받고 돌아와 Northwestern대의 교수로 근무하다 1892년 시카고대학의 초대 수학과장으로 스카우트된 E. H. Moore를 중심으로 미국의 수학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많아진 학술활동에 힘입어 1898년 AMS회원들은 소식지 성격의“Bulletin"에서 벋어나 수학 연구 저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자연스레 1878에 Sylvester에 의해 창간되고, Johns Hopkins대학을 통하여 출판되던 American Journal of Mathematics와 협력하는 방법을 생각한 후 AMS 가 편집권을 접수하고 편집비용의 일부를 지원하는 안을 제시하였다. 이 제안은 당시 AMS 회장인 Simon Newcomb이 Hopkins대학의 교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Newcomb이 지원금은 받고 편집권은 양도하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AMS 라는 이름을 American Journal of Mathematics의 표지에 넣는 것은 저널의 품위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거부함으로 오래지 않아 이 협력은 깨졌다. 그러자 젊은 AMS 회원들은 AMS 자신의 새로운 수학 전문저널을 발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더욱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래서 대안으로 AMS가 Transaction을 발간하기로 한다. 비로소 미국에서의 두 번째 수학 연구저널이 Yale대학 박사인 E. H. Moore를 초대 편집장으로 하여 20세기를 여는 1900년 1월 창간호를 발간한다[E].
그에 앞서 American Mathematical Monthly도 1894년 창간호를 발간하여 1900년에는 이미 7년 동안 존재했었다. 그러나 이 저널은 학회가 아니라 미주리 주의 고교교사인 Benjamin Franklin Finkel이라는 개인에 의해 창간되었다. 창간호를 보면 첫 페이지에 “보통의 수학자에게 도움을 주기위해 노력한다.” 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초창기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유는 이 저널도 보통 수학자들에게는 어려워서 고교교사들이 구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Finkel은 여기서 기지를 발휘해 방향을 바꾸어 대학교수들의 도움을 얻어 원고도 확보하고 편집비 지원도 받아 고교교사보다는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모든 사람을 주 독자로 크게 발전하여 현재 전 세계인이 구독하는 미국수학교육학회(MAA)의 주요 저널로 자리 잡았다.
Annals of Mathematics는 Sylvester가 떠난 후 43년이 지나 1884년 버지니아 대학의 Ormond Stone에 의해 창간되었다. 그것이 1899년 주관학교가 버지니아대에서 Harvard대로 이관되어 새롭게 탄생한다. 새로 탄생하며 이 저널의 목표를‘American Journal of Mathematics’또는 새 저널인 ‘Transactions’과는 다른 목표로 전문가에게 보다는 일반 수학적 대중을 대상으로 짧은 exposition을 게재할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저널의 주관 학교는 1911년 Princeton 대학으로 옮겨지고, 1933년부터 Princeton 대학과 Institute for Advanced Study가 함께 편집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저널이 당시 세계를 주도하였던 유럽의 전통 있는 수많은 수학 저널을 제치고, SCI impact factor가 제일 높은 21세기 초 수학계 최고로 여겨지는 저널로 성장할 것 이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 했을 것이다. 이는 한국도 우리 색을 갖는 수학 저널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5. 한국의 상황
우리는 위의 논의를 통하여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100년이 지나도록 황무지나 다름없던 미국의 수학계가 J. J. Sylvester라는 한 명의 수학자(미국 최초의 유태인 수학교수)를 초빙함으로서 그로부터 시작하여 Felix Klein으로 이어지며 25년간 만들어진 변화와 자극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미국이 배출한 E. H. Moore라는 걸출한 수학교수가 지금부터 100년 전 미국수학계를 주도하면서 미국은 유럽의 수학을 흡수하고 또 독창적인 기여를 했으며 마침내 독일과의 2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루며 초창기 자신을 인도한 독일과 영국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 21세기를 맞이한 지금 수학 세계의 판도를 완전히 바꾼 과정’을 보았다.
한국과 동아시아는 수 천년동안 문화적으로는 물론 생활수준에서도 유럽보다 훨씬 앞서있었으면서, 지난 수백 년간 새로운 과학 기술의 경쟁에서 유럽과는 너무나 다른 길을 지나왔고, 그 결과로 특히 한국은 100년 전 나라를 잃고, 50년 전 민족상잔의 전쟁을 거치며 결국 폐허에서 다시 시작하였다. 1888년 Florian Cajori가 자료조사를 할 당시 조사에 참여한 118명의 대학 수학교수 중 73명은 수학이외의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으며, 그 들 중 32명은 자연과학이외의 예술, 음악, 언어,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1893년에는 미국에서도 약간의 대학원 강좌를 수강한 경력만으로도 명문대학에서 정년교수로 임용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던 것이 1900년이 되어서야 박사학위가 명문대학의 교수가 되기 위한 필수요건이 되었다. 1901년이 되어서 Yale대학의 총장이 교수에게 논문의 출판과 강연을 의무사항으로 요구하였으며, 이때부터 Stanford대학도 교수들의 연구업적을 모아 연보로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주요대학에서부터 연구가 대학교수로서의 의무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1895년의 미국 대학들은 새로운 대학으로 태어나는 변화에 진입하고 있었다. 미국의 경제적 성장과 함께 대학의 목적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1906년 저널 Outlook 의 편집장은 영국의 대학은 문화, 독일의 대학은 Scholarship을 추구하는데 미국의 대학이 추구하는 것은 Service 라고 정의하였다. 당시 대학의 새 총장들은 그들의 역할을 자신의 대학을 대중에게 어필시키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였다. 1900년에 이르러서 Harvard에는 사실상 필수과목이 모두 없어졌다. Cornell, 위스콘신, 미시간, Yale도 거의 모든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바꾸었다. William Duren은 [D, part II, p. 399 ]에서 미국 대학에서 선택과목이 늘어나며 교육의 중요성이 인식되었고, 수학의 역할과 수학과의 크기가 팽창하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미국수학계에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외국인 수학자의 유입의 영향을 고려하여도, 100년 후 유럽을 능가하는 미국대학의 경쟁력은 이런 변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성공적으로 적응한 저력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식민지시대를 지나 바로 겪은 한국 전쟁 후 한국의 모습 특히 한국수학계의 모습은 몹시 불만족스러웠으나 이는 미국이 식민지에서 벗어나던 때와 비교하면 큰 차이가 없으며 우리가 지난 50년간 성장해온 모습과 미국이 지난 100여 년간 발전해 온 과정과 비교하면 실제로 우리의 발전과정은 미국이 거친 모든 과정을 유사하게 거쳤다. 특히 현재 한국 대학이 추구하는 대학의 개혁이, 바로 100년 전 미국의 대학에서 선언한 선택과목의 확대와 연구중심대학의 탄생, 교수의 연구, 교육 및 봉사의 강조와 유사한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몇 가지 예를 언급하면 1893년 미국에서 대학교수 임용 기준은 1980년대 중반의 한국 상황과 일치하며, 1901년이 되어서 Yale대학과 Stanford대학에서부터 연구가 대학교수로서의 의무로 인식되기 시작된 상황은 한국의 경우 1980년대 말부터 전개되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100년 후 22세기를 맞으며 100년 동안 미국이 했듯이 우리도 얼마든지 우리들에게 현대수학을 소개한 나라보다 앞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다. 이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취할 방향과 노력이 무엇인지가 어렴풋이 보인다. 앨빈 토플러는 봉건사회에서는 강제력, 산업화사회에서는 자본력이 권력이었으나, 정보화 사회에서는 지식정보가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며‘속도’가 매우 중요한 경쟁의 수단이 될 것이라 하였다. 산업화 사회의 꽃이 철강산업이라면, 정보화 사회에서는 정보통신 산업이다. 다행히 한국은 철강산업에서 잠자던 국가경쟁력을 일깨웠고, 정보통신 분야에서 원천기술은 없었으나, 응용기술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분야가 생기기 시작하고 있다. 또 인터넷 원천기술은 없으나 그 사용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정]. 정부는 한국을 e-러닝의 허브로 만들고 디지털 경쟁력 강화를 위하여 2005년에 총 4천171억원을 정보기술(IT) 분야에 투입한다고 선언하고, 이공계 교육과정 개선을 위해 매년 40억원을 지원한다는 대학 이공계 교육과정 개선 5개년 프로젝트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대학 이공계 교육과정 개선을 위해 올해부터 2009년까지 매년 40억원 예산이 지원된다[최]. 교육인적자원부는 1월 20일 최소한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대학 이공계 교육과정 개선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FUCO 전략(Flagship Universities and Colleges in curriculums)’으로 불리는 이 프로젝트는 철저한 선택을 통해 소수 대학의 특정 교육과정에 대한 집중적인 재정투자를 통해 교육과정에 있어 국내 다른 대학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고, 해당분야 교육내용에 있어 세계 최고 대학을 육성한다는 것이 그 취지다. 지원분야는 일반교양 및 기초직업능력 제고(매년 8억원)과 수학 및 기초과학 능력제고(매년 4억)을 포함한다. 이런 연구지원비의 지원형태 변경은 20세기 말 미국이 기존 연구력의 수월성에 근거한 발전에서 더 나아가 미국이 현재 유지하는 수월성을 유지하는 관건은 다음 세대의 교육에 달려있다고 판단하고 순수학술연구비 지원보다 연구를 위한 교육과 교육 환경개선에 투자를 늘려온 예와 일치한다.
우리는 대학의 인적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안을 지금 이상으로 개발해야 한다. 21세기는 과학기술의 시대이고, 이를 뒷받침할 이공계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의 70% 이상이 모인 곳이 대학이다. 특히 한국에서 수학 분야는 박사학위자의 90% 이상이 대학에 모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인력을 활용하여 미국이 선택과목의 확대로 대학의 영역을 넓히며 경쟁력을 키웠듯이 차별화된 새로운 교육 방법과 수학의 저변 확대는 물론 미국 수학이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학문의 스승이자 적대국인 독일에의 종속성을 극복하는 계기로 삼으며 선형계획법과 OR을 개척하고 응용수학에서 차별화 한 후, 이어서 순수수학에서도 독자적인 경쟁력을 확보한 예에서 보듯이 우리도 경쟁력이 있는 타 분야의 능력과 여건을 최대한 활용한 수학에서의 독자적 연구 역량을 키워야 할 때이다.
100년 전의 상황은 중국 중심의 구질서가 붕괴하고 서구 열강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한·중·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근대적 개념의 동아시아론’이 등장했다. 이는 2004년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촉발되어 동아시아에 펼쳐진 앞으로의 100년에 대한 각국의 경쟁상황과 유사하다[경]. 이러한 시점에서 과학기술의 보루인 수학 분야에서 우리가 보낸 지난 100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6. 결 론
위의 논의를 바탕으로, 우리도 얼마든지 수학적 국제경쟁력을 갖춘 나라로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다. 한국의 경제력은 세계 12위권이고, 2000년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세계 4위에 이어 2002년 월드컵에서도 세계 4강에 이르렀다. 더구나 한국 젊은이의 국가 인식은 20세기 초 식민지 시대의 패배감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본다. 특히 현재까지 한국에서 수학교육의 질은 소수를 대상으로 한 국제수학올림피아드는 물론 일반학생을 대상으로 한 최근의 PISA(Programme for International Student Accessment), TIMSS(Trends in International Mathematics and Science Study)를 통한 국제 평가에서, 초-중-고교 저학년의 경우 우리 학생들의 우수한 학업성취도로 다시 한번 검증되었다. 한국은 정보통신의 응용기술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분야가 생기기 시작하고 있으며, 인터넷 기술의 사용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이를 이용하면 우리는 21세기 정보화 사회에서는 지식정보의 생산과 속도에서 다른 어떤 나라도 앞설 수 있다고 자신한다. 우리는 한국 학생이 초-중-고교 과정에서 갖춘 강한 수학적 배경과 반만년 유구한 문화적 전통 및 IT 분야에서의 한국의 수월성을 연계한 우리의 대학교육을 통하여 더욱 강한 수학적 능력을 갖춘 새로운 인재를 배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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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kowledgement
본 원고의 초안을 읽고 표현의 개선을 위한 다양한 조언을 주신 한국수학교육학회 신현용회장님, 대한수학회 황석근부회장님과 이상욱교육이사님과 한국수학사학회 강신원교수님에게 감사드린다.
<국제 선형대수학회 창립총회, August 12-15, 1989, Provo, Utah, USA> - 정면 중앙 : Tood 와 Olga Taussky 부부>
http://www-groups.dcs.st-and.ac.uk/~history/Mathematicians/Taussky-Todd.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