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
사례 바로가기
사례 1 - 신라의 교육
사례 2 - 구장산술
사례 3 - 통일신라 과학
사례 4 - 인수신편
사례 5 - 중국의 억지
사례 6 - 동양의 뉴우톤
사례 7 - 세종대왕법칙
사례 8 - 세종대왕
사례 9 - 이상설
사례 10 - 최규동
사례 11 - 장기원
사례 12 - 이임학
사례 13 - 인쇄술
사례 14 - 과학기술사
사례 15 - 한국의술사
사례 16 - 조셉 니덤
사례 17 - 중국 과학 문명
사례 18 - 소행성의 이름
사례 19 - 2046년에는
사례 20 - 천문학
사례 21 - 한국천문학사
사례 22 - 여성과 과학
사례 23 - 첨성대와...
사례 24 - 전통과학
사례 25 - 만화 중국과학
사례 26 - 월식
사례 27 - 구장산술
사례 28 - 문화속의수학
사례 29 - 성균관
   
 

<사례 13> 인쇄술

동아시아 과학 기술의 전통과 미래라는 제목의 논의를 진행하며 서양과학보다 빨랐던 동양과학이 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였을까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아래의 내용은 문화적인 차이에서 그 이유가 분명히 존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쇄술
오늘날 인쇄술의 주요 형태는 활판 인쇄술로서 1445년경에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발명한 이후에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 덕분에 손으로 하면 원고 한 부밖에 베끼지 못할 시간에 수천 권의 책을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1460년부터 1500년까지 단 40년 동안 유럽에서는 전체 중세 시기의 약 40배에 달하는 책자가 쏟아져 나왔다. 인쇄술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접할 수 있게 함으로써 폭넓은 식자층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촉진하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정보를 통치자나 교회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스스로 정보를 해석하면서 기존의 견해에 도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직까지 많은 역사가들은 인쇄술이 동양에서 최초로 출현했지만 오히려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되었기 때문에, 유럽은 근대 사회로의 진입이 가속화되었지만 동양에서는 근대 문명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진실일까?

동양의 목판인쇄술은 서양의 르네상스와 같아

구텐베르크의 발명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은 보통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활판 인쇄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문서를 복제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으나 모두 적절하지 않았다. 하나는 글을 일일이 손으로 베껴 쓰는 방법으로서, 그것은 매우 지루한 작업이었으며 정확도가 떨어지기 십상이었다. 다른 방법은 페이지 전체를 나무판 표면에 새긴 후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어내는 목판 인쇄술이었다. 그것은 많은 수의 복사본을 만들 수는 있었으나 모든 페이지를 하나하나 힘들게 새겨야 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활판 인쇄술에서는 금속으로 주조 활자들을 제작하고 그것들을 조합하여 원하는 문장을 만들면, 인쇄 작업이 끝난 후에도 활자를 해체하여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최초의 착탈식(着脫式) 활자는 목판 인쇄용 판에서 떼어내었을 것이지만, 활판 인쇄술은 자신의 조상인 목판 인쇄술보다 제작이 쉬웠기 때문에 훨씬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설명이 서구 사회에서는 타당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동양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다. 몇몇 학자들은 ‘송대(宋代) 르네상스’를 거론하면서 이에 비견할 만한 지적 혁명을 촉발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주장한다. 8세기에 중국인이 발명한 목판 인쇄술은 10세기 중엽에 공자의 유교 경전들이 출판되면서 뛰어난 효용성을 발휘하였다. 130권으로 이루어진 이 저서들은 공자 전집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후 중국의 문화와 사상의 발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더 나아가 목판 인쇄술은 불교 경전, 왕조의 역사, 지방의 역사, 잡록집(雜錄集), 백과사전, 식물학, 의술서, 농업서적 등 수많은 서적을 출판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여기서 불교 경전 사업은 약 10년에 걸친 대규모 프로젝트로서 그 기간에 무려 5048권, 13만 페이지에 달하는 위대한 출판 기록을 남겼다.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어떤 다른 나라보다도 많은 수의 인쇄 서적을 보유하고 있었던 국가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중국에서도 활판 인쇄에 대한 실험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11세기에 점토 활자로 시작된 이 실험은 13세기의 목재 활자를 거치면서 더욱 현실화되었다. 이후에는 금속 활자에 대한 시도가 있었는데, 문헌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234년에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를 발명하였고 중국은 1403년에 이를 뒤따랐다. 활자만을 놓고 보면 동양이 서양보다 2백년 정도 빨랐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판 인쇄술은 동양에서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금속활자, 동양이 서양보다 2백년 빨라

많은 사람들은 그 이유를 기술적 차원에서 찾는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기술적 측면에서 미완성의 작품이었다. 활자만 금속으로 만들었지 여전히 손으로 한 장씩 찍어가면서 제본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에 반해 구텐베르크는 활자는 물론 인쇄기를 만들었고 활판 인쇄에 필요한 종이와 잉크를 선택하는 데에도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것은 하나의 기술이 아니라 여러 가지 기술이 결합된 일종의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서양의 활판 인쇄술은 쉽게 대량생산의 길에 접어들 수 있었던 반면 동양의 경우에는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나고 말았다. 인쇄물이 가진 예술적 가치도 중요한 이유이다. 예술적 형태라는 측면에서 활판 인쇄본은 목판 인쇄본의 우수성을 따라가기 어렵다. 서예를 배운 사람들이나 디자인의 미묘한 차이에 민감한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중국에서 주로 인쇄된 경전이나 왕조사는 실용성에 못지않게 예술성도 매우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더욱 중요한 대답은 실용성에 있다.
활판 인쇄 문화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목판 인쇄본의 실용성이라는 개념은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영어의 알파벳은 26자인 반면 한자는 수천 개에 이른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서구 사회에서는 활판 인쇄를 위해서 수십 개의 활자 주형을 만들면 그만이겠지만, 동양 사회에서는 활판 인쇄용 활자를 수천 개나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구나 한자의 다양한 글씨체까지 고려한다면 동양 사회에서 목판 인쇄술이 활판 인쇄술보다 실용적이라는 점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동양에서 활판 인쇄술이 오랫동안 인기를 얻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이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상상을 할 수 있다. 한글의 자모는 24개가 아닌가? 만약 우리나라가 한자를 버리고 한글을 빨리 채택했다면 활판 인쇄술이 융성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실용성에는 또 다른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목판 인쇄용 판을 새기는 데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는 점이다. 어떤 인쇄술 연구자가 목판 조판공에게 가로 5인치 세로 7인치 크기의 작은 페이지에 목판을 새기도록 한 적이 있었다. 그 조판공은 작업을 완수하는 데 무려 30∼35시간을 소요하였다.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는 목판 인쇄술을 중국은 왜 고집했을까?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16세기의 중국에서는 목판 인쇄술에 숙달되어 있는 기술자 집단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목판 인쇄판을 새기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에 중국을 방문했던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에 따르면, 유럽의 조판공이 2절 크기의 페이지를 금속활자로 짜는 데 걸리는 시간과 중국의 기술자가 비슷한 크기의 목판을 새기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비슷하였다. 중국에서는 목판 인쇄술이 송 왕조 시대의 출판 요구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었지만 서양에서는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유럽에서 목판 인쇄술은 약 1세기 동안 사용되었지만 활판 인쇄술이 등장한 이후에 급격히 쇠퇴하였다. 목판 인쇄술은 주로 소수의 전문가들에게 국한되어 비밀리에 전수되거나 소규모 집단이 간단한 유인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서적 제조기술의 측면에서 서양의 목판 인쇄본은 고도의 예술적 표현이 아니라 형편없이 제작된 것이었고, 양적인 면에서 보면 양면 92장이 가장 많은 분량에 해당할 정도로 매우 적었다.

서구 중심적 발상 버려야

이상의 논의에 비추어 볼 때 동양에서는 오랫동안 목판 인쇄술이 매우 우수한 기술로 자리 잡았으며 활판 인쇄술의 사용에 대한 동기부여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왜 인쇄술이 발전하지 못 했는가”하는 질문은 잘못된 문제 제기에 해당한다. 기술이 각 사회의 구체적인 맥락과 무관하게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는 잘못된 가정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질문은 서구의 기술 유형이 모든 기술의 보편적인 잣대로 기능한다는 서구중심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기술이 과거에도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현재 중심적 역사해석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경쟁’의 개념을 다시 새겨 보아야 한다. 우리는 경쟁을 주로 승리(자)와 패배(자)를 비교적 분명하게 가려내는 과정이나 수단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경쟁자 양쪽이 모두 공존할 수 있는 경우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서양의 활판 인쇄술과 동양의 목판 인쇄술은 서로를 위축시키지 않고 자신의 진영을 구축하면서 오랫동안 공존할 수 있었다. 서구중심적인 관점으로 한발 양보하더라도, 목판 인쇄술은 동양 사회에서 수세기 동안 활판 인쇄술에 대한 대체물로 기능했던 것이다.
송성수 <박사·과학기술정책연구원>
출처 (http://www.printingkorea.or.kr/17ho/17-10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