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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13> 인쇄술 동아시아 과학 기술의 전통과 미래라는 제목의 논의를 진행하며 서양과학보다 빨랐던 동양과학이 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였을까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아래의 내용은 문화적인 차이에서 그 이유가 분명히 존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쇄술 동양의 목판인쇄술은 서양의 르네상스와 같아 구텐베르크의 발명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은 보통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활판 인쇄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문서를 복제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으나 모두 적절하지 않았다. 하나는 글을 일일이 손으로 베껴 쓰는 방법으로서, 그것은 매우
지루한 작업이었으며 정확도가 떨어지기 십상이었다. 다른 방법은 페이지 전체를 나무판 표면에 새긴 후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어내는 목판 인쇄술이었다. 그것은 많은 수의 복사본을 만들 수는 있었으나 모든 페이지를 하나하나 힘들게 새겨야 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활판 인쇄술에서는 금속으로 주조 활자들을 제작하고 그것들을 조합하여 원하는 문장을 만들면,
인쇄 작업이 끝난 후에도 활자를 해체하여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최초의 착탈식(着脫式) 활자는 목판 인쇄용 판에서
떼어내었을 것이지만, 활판 인쇄술은 자신의 조상인 목판 인쇄술보다 제작이 쉬웠기 때문에 훨씬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설명이 서구 사회에서는 타당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동양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다. 몇몇 학자들은 ‘송대(宋代)
르네상스’를 거론하면서 이에 비견할 만한 지적 혁명을 촉발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주장한다. 8세기에 중국인이
발명한 목판 인쇄술은 10세기 중엽에 공자의 유교 경전들이 출판되면서 뛰어난 효용성을 발휘하였다. 130권으로 이루어진
이 저서들은 공자 전집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후 중국의 문화와 사상의 발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금속활자, 동양이 서양보다 2백년 빨라 많은 사람들은 그 이유를 기술적 차원에서 찾는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는 기술적 측면에서 미완성의 작품이었다. 활자만
금속으로 만들었지 여전히 손으로 한 장씩 찍어가면서 제본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에 반해 구텐베르크는 활자는 물론 인쇄기를 만들었고 활판 인쇄에 필요한 종이와 잉크를 선택하는 데에도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것은 하나의 기술이 아니라 여러 가지 기술이 결합된 일종의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서양의 활판 인쇄술은 쉽게 대량생산의 길에 접어들 수 있었던 반면 동양의 경우에는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나고 말았다. 인쇄물이 가진 예술적 가치도 중요한 이유이다. 예술적 형태라는 측면에서 활판 인쇄본은 목판 인쇄본의
우수성을 따라가기 어렵다. 서예를 배운 사람들이나 디자인의 미묘한 차이에 민감한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중국에서 주로 인쇄된 경전이나 왕조사는 실용성에 못지않게 예술성도 매우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더욱 중요한 대답은 실용성에 있다. 서구 중심적 발상 버려야 이상의 논의에 비추어 볼 때 동양에서는 오랫동안 목판 인쇄술이 매우 우수한 기술로 자리 잡았으며 활판 인쇄술의 사용에
대한 동기부여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왜 인쇄술이 발전하지 못 했는가”하는 질문은 잘못된
문제 제기에 해당한다. 기술이 각 사회의 구체적인 맥락과 무관하게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는 잘못된 가정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질문은 서구의 기술 유형이 모든 기술의 보편적인 잣대로 기능한다는 서구중심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기술이 과거에도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현재 중심적 역사해석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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