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林學박사와의 대담 (大韓數學會史 1권)


   - 본 대담은 1996년 10월 25일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있었던 내용으로 그 일부가 “과학과 기술誌” 1996년 12월호에 게재되었음. -


  李 林 學 함남 함흥 1922년 생

                 경성제대 물리학과 졸업

                 브리티쉬 컬럼비아대 Ph.D.

                 서울대 교수

                 브리티쉬 컬럼비아대 교수

                 카나다 왕립협회 회원

대담자 :   權  景  煥  포항공대 교수

     李  正  淋  포항공대 교수

     高  英  昭  서울대 교수

     朱  鎭  球  충남대 교수, 대한수학회 회장


  : 이임학 박사님께서 여기에 오신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현대수학의 근원을 알아보고 현대수학이 도입될 때의 수학교육, 연구의 배경과 환경 또 이임학 박사님의 학문적 업적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려고 이 자리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서 마련하였습니다. 이런 대담은 한국에 있는 후배 수학자들에게 50여년 전 우리가 수학을 어떻게 시작하여 현재에 와 있는가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이 되는 의미 있는 일로 여겨집니다. J. Dieudonné 가 쓴 A Panorama of Pure Mathematics 안에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군이론에 근원적으로 공헌한 21명의 큰 수학자들 사이에 이임학 박사님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기뻤습니다.    ( (權景煥), (李正淋), (高英昭), (朱鎭球) )


   우선 선생님은 어린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옛날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에서 교육받으신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임학 : 나는 1922년에 출생하였습니다. 어렸을 때 뭘 만드는 것을 좋아했고 특히 중학교 때 철판을 가위로 베고 자르고 코일을 감고 해서 전기 모터를 만들었습니다. 망원경도 만들어 봤고 이것저것 만드는 것에 상당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학은 잘 했다는 것뿐이고, 학교 수학시간에 선생님이 물으면 손을 들고 대답하지는 않고 우물우물 했지만 답은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내가 수학을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수학을 잘했지만 장차 수학자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수학자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나는 1939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들어가서는 동경제대를 갓 졸업한 물리학과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수학을 몹시 좋아하였는데 내가 수학을 잘해서 나를 참 아껴 주었습니다. 그분이 나에게 사영기하, 집합론, 군론, 갈로아이론 등의 책에 관하여 이야기 해주었고 책도 빌려주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수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당시 경성제국대학에는 수학과가 없어 나는 물리학과에 들어갔는데 물리학은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습니다. 졸업에 예과 3년 학부 2년 반이 소요되었습니다. 졸업을 하긴 했지만 주임교수한테 인사하러 가지도 않았고 졸업식에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일본 사람들은 조선인 거부 박흥식씨의 돈에 관심을 갖고 그 사람의 돈을 가지고 조선 비행기회사를 만들고 안양에다 공장을 만들 계획이었습니다.

   조선비행기회사를 만들었다 해도 물자도 없었고 공원과 기술자도 없었습니다. 내가 졸업할 때, 이 비행기회사에서 공원과 기술자를 모집하였습니다. 나는 이 회사에 기술자로 취직하였습니다. 공원과 기술자를 만주비행기회사로 보냈는데 그 회사는 일본사람의 회사였습니다. 나는 제품을 검사하는데 근무하였고 군대에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지내다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 수학공부에 대해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이임학 : 학부 때 수학은 거의 독자적으로 공부하였습니다. 그 당시 宇野 교수가 타원함수를 강의하였는데 나는 그 강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나는 일제의 식민정치 때문에 대학 전체에 대하여 반감을 가졌습니다. 예과 때 물리학 선생 덕분에 수학이 어떤 것인지 대충 알았고 수학의 웬만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는 어디에서 공부하셨습니까?

   이임학 : 보통학교 ( 초등학교 ) 는 함흥에서 다녔습니다. 중학교는 함남 중학교 ( 함흥고등보통학교 ) 를 졸업하였습니다. 일본사람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소학교라 불렀고 한국사람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보통학교라 하고 일본사람이 다니는 중등학교는 중학교 한국인이 다니는 중등학교는 고등보통학교라고 구별해서 불렀습니다. 후에는 고등보통학교도 중학교라 불렀습니다. 함남중학교도 이 경우에 해당됩니다.

  : 이 선생님께서 언제 서울대학교에 부임하셨는지 그리고 서울대학교에 부임하신 계기는 무엇인지요?

   이임학 : 당시 수학회의에서 투표로서 김지정, 유충호, 나를 뽑아서 서울대학에서 강의하기로 정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긴 했지만 몇 달 후에 국대안 반대로 서울대학에서 나왔습니다.

  : 이임학 선생님이 사임하고 나오신 후 그 당시 서울대학에는 누가 계셨습니까?

   이임학 : 내가 서울대학에서 사임한 후에 최윤식 선생이 광산전문학교에서 서울대학으로 1946년인가 부임하였습니다. 본래 최윤식 선생님은 동경제대를 졸업하셨습니다. 그 후 나는 휘문중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는데 서울대학에서 들어오라고 해서 다시 서울대학으로 돌아왔습니다.

  : 이임학 선생님께서 서울대학에 부임할 때 세분을 선출한 위원은 누구였습니까?

   이임학 : 정확한 것은 잘 모르지만 적어도 15명 이상이었고 20명 정도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최윤식, 김지정, 이재곤, 유충호, 홍임식, 이임학 등이었습니다.

  : 박정기 선생님은 안 계셨어요? 동북제국대학 나오신 분이지요.

   이임학 :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안 납니다.

  : 선출된 세분, 김지정, 유충호 선생이 가르친 과목은 무엇이었습니까? 과목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임학 : 나는 독일어로 된 책  Van der Waerden 의 Moderne Algebra를 강의했고 김지정씨는 아마 해석학, 유충호씨는 미분기하를 강의한 것으로 압니다.

  : 선생님께서 첫 논문을 쓰신 것에 대하여 이정림 선생님으로 부터 듣고 놀랐습니다. 아니 놀랬다기보다는 경이로웠다는 표현이 알맞겠습니다. 첫 논문에 대하여 자세히 들려주세요.

   이임학 : 1947년이던가 그 때는 새 학술잡지와 도서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대학에서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정치싸움에만 바쁘고 학문과 대학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남대문 시장을 지나는데 길가에 종이 책 등 쓰레기 더미를 보게되었습니다. 거기에 Bulletin of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1947년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것을 주워서 집에 가지고 와서 펼쳐보니 M. Zorn 의 논문이 있어 읽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결과가 중요한데 M. Zorn 은 모르겠다는 내용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내가 생각해 보니 금방 해결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논문을 써서 M. Zorn 에게 보내면서 출판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논문을 써서 직접 잡지의 편집인에게 보낼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M. Zorn 은 그 논문을 1948년 미국수학회의 Bulletin에 투고하였고 그 논문이 1949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때는 읽고 연구할 잡지, 책들과 자료가 없었습니다. 지금 한국은 연구하기에 참 좋은 환경입니다.

  : 이임학 선생님 논문을 조사해 보았는데 Mathematical Reviews 에 1949년의 R. Ree 논문이 있어 이것은 잘못된 게 아닌가 1949년에 이 선생님의 논문이 나올 리가 없는데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첫 논문이 캐나다에 계실 때 1954년에 출판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권경환 박사에게 물어보고 이선생님 한테 알아보았는데 사실인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나는 우리가 우리자신을 너무 모르고 지내온 것을 알았습니다. 이임학 선생님께서 1949년에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학술지에 논문을 출판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논문제목은 ‘Zorn 의 문제’ 였고 Mathematical Reviews 에서 Princeton의 Solomon Bochner 가 이 문제는 자기가 관심 있었던 것이었는데 풀렸다는 평이 있었지요.

  : 6?25 한국동란 때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이임학 : 인민군이 서울에 쳐들어 와서 피난 갈려고 한강에 갔더니 다리가 끊어져서 한강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날 밤을 보냈고 할 수 없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인민군이 점령했을 때 쌀이 없어 고생 많이 하였습니다. 하루는 그자들이 우리집에 쳐들어 와서 나를 찾았습니다. 어머니는 그사람들 보고 “임학이 의용군에 나갔다”고 말하니 그냥 가버렸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후에 집에 숨어 있었는데 9월에 국군이 들어와서 수복되었습니다. 그 다음 겨울에 공산군이 쳐들어 와서 1?4후퇴 때는 서울에서 트럭을 준비하여 인천에 가서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갔습니다. 그 배에는 서울대 교수 직원과 가족들이 같이 탔습니다. 그 후 제주도에 있으니 서울대학이 부산에서 연다는 말을 듣고 부산으로 갔습니다.

  : 수학회에 대해 기억나시는 일이 있습니까?

   이임학 : 그때 역할을 하신 분으로 조 누군가라는 분이었습니다. 임 누군가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사람은 나중에 수학과에 들어왔습니다. 최윤식, 유충호, 김지정, 이재곤, 홍임식 등 여러분이 있었습니다. 이재곤씨는 이북에 간 사람인데 이북에서 해외로 나갈 때 다른 몇사람과 꼭 같이 다녔습니다. 이재곤씨는 집이 빈곤하고 수학을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 사회에서 성분이 좋았습니다. 홍임식씨는 일본 나라고등사범을 나온 여성인데 우노 교수의 조수로 지냈었습니다. 20명 정도였습니다.

  : 수학회에서 연구발표회를 가졌습니까?

   이임학 : 수학회가 그럴 시간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조씨가 세미나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 후에 생각해보니 앞으로 서울대학에서 가르칠 사람을 선택하려면 서로 전공 등 여러 가지를 알고 싶어서 제안한 것 같았습니다. 나이 많은 분은 세미나에 참가하지 않았고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 참가하였습니다.

  : 세미나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임학 : 입문으로부터 시작하여 군론, 미분기하 등으로 기억합니다.

  : 당시 수학회에 대하여 설명해 주세요.

   이임학 : 수학회는 1946년에 수학회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 모임은 순수한 수학자뿐이었습니다. 물리학자는 없었습니다.

  : 선생님이 캐나다 브리티쉬 칼럼비아 대학에 유학 가시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이임학 : 나는 그때까지 대학에 편지만 하여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었습니다. 그때 나는 외국에 빨리나가 공부하고 싶었었습니다. 외국대학 사정은 전혀 몰랐습니다. 나는 가끔 미국공보 ( USIS ) 에 가서 Mathematical Reviews 를 보았습니다. 어떤 분이 쓴 것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여 편지했는데 장학금을 주겠다고 편지가 와서 나는 당신학교에 가겠다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 후에 워싱턴대학 ( Seatle 소재 ) 에서 더 많은 장학금을 준다는 제의가 있었지만 브리티쉬 칼럼비아 대학으로 갔습니다. 그때 생각으로는 한 번 간다고 약속한 후에 변경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더 좋은 대학을 선택할 줄 몰랐습니다.

  : 피난시절 부산에서 천막 안에서 대한수학회 회장을 뽑은 기억이 있습니까?

   이임학 : 없었던 것 같습니다.

  : 1952년 부산에서 대한수학회에서 회장을 최윤식 선생님으로 선출하였습니다. 내가 선생닙, 최윤식 선생님, 주석순과 같이 갔습니다. 끝난 다음에 최윤식 선생님 댁에 같이 갔었습니다.

  : 경남상고에서 주석순 선생이 계셨는데 거기서 회의에 관한 서류를 등사하였다고 합니다.

  : 30여년 전에 선생님 이름이 신문에 난 것을 읽었습니다. 선생님이 수학으로 학문적 업적이 커서 캐나다 왕립협회 회원이 되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연구하신 것을 설명해 주세요?

   이임학 : 나는 실패를 거듭 되풀이 한 사람입니다. 물론 논문을 몇편 썼지만 그것은 생각 ( idea ) 이 순간적으로 나서 논문으로서 정말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나는 정말 도전하였던 것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 연구 생활에서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세요?

   이임학 : 나는 연구한 일이 없습니다

  : 그럼 장편 논문을 어떻게 쓰셨습니까?

   이임학 : 그것은 짧은 생각이었습니다.

  : 지금도 가장 풀고 싶은 것은 어떤 것입니까?

   이임학 : Artin의 미해결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아이디어가 나오면 굉장한 주목을 받을 겁니다.

  : Oregon에 있을 때 어떤 회의에서 브리티쉬 칼럼비아대학에서 온 수학자를 만나 선생님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분 표현은 이임학 선생님을 “유명한 수학자”라고 말했었습니다.

  : 미시간에서 McLaughin 에게 이선생님에 관하여 물었더니 “이임학 박사를 모르는 학교는 학교가 아니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 서울대학은 학교일지도 모릅니다.    ( 모두 웃음. 여하튼 이 선생님은 유명한 수학자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 현재 북미에 있는 한국인 수학자 중에서 논문을 통해서든지 아시는 분에 대하여 말씀해 주세요.

   이임학 : 매일같이 학교에 가서 논문을 조사해 보는데 내가 주목하는 분야에는 기억이 없습니다.

  : 한국에 있는 후배 수학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요?

   이임학 : 내가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말이 있을까요?  얼마 전 프린스톤 고등연구소에서 학술회의가 있어 가보았습니다. 거기에서 만난 한국수학자중에는 잘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반면 어떤 분은 수학적인 내용은 별로 없고 표면적인 내용을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보이기 위하여 발표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수학자는 이와 정반대 되는 태도를 갖고 학문에 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 말씀은 진실하고 깊이 있게 공부하라는 뜻 같습니다. 이선생님이 참가하신 회의는 이선생님이 가르치신 바 있는 Langlands 의 6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프린스톤 고등연구소에서 갖는 모임이었습니다. Larglands 는 브리티쉬 칼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사람으로 이선생님한테 배운 사람이고 이 회의에 이임학 선생님이 초대되어 가신 것입니다. 이선생님이 한국에 계셨더라면 좋은 수학자를 길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요사이는 어떻게 지내십니까?

   이임학 : 학교에 나가 매일 논문을 조사하고, 읽고 싶은 것이 있으면 복사하여 읽습니다. 매일 수영도 하면서 지냅니다.

  : 이임학 선싱님의 논문인용에 관하여 조사해 보았습니다. 선생님의 Ree Group 에 관한 연구가 1984년부터 1994년까지 10년간 90여 편의 연구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연구하는 분은 찾지 못했습니다.

  : 박사학위 받으신 후에 한국에 귀국하시지 않고 외국에 계속 계셨습니다. 왜 귀국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임학 : 공부를 더 하려고 몇 년 동안 북미에서 머물고 싶었습니다. 여권을 연장하려고 했습니다. 영사관에서 여권을 빼앗겼습니다. 영사관 말이 “당신은 한국에 돌아갈 거라고 생각되어 여권을 없애버렸다”. 외국에서 여권을 없앤다는 것은 본인에게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캐나다 정부는 국적 없는 사람으로서 영주권과 얼마 후에는 시민권을 준것입니다. 즉 나는 한국시민권을 박탈당한 셈입니다.

  : 제가 느낀 점은 선생님과 같은 훌륭한 수학자들이 한국에서 수학교육 및 연구를 시작하여 그 제자들이 생겼고 또 제자의 제자가 나왔고 이렇게 계속되어 오늘날 우리의 수학계가 이루어 졌다고 봅니다.

   오늘 오랜 시간 좋은 말씀을 해주신 이임학 선생님 그리고 권경환, 이정림, 고영소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李林學 선생님에 대한 회고

          by 吳   允   用 (1928년 생,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 졸업, Brandeis대 Ph.D)


   경성제국대학에는 수학과가 없었던 관계상 부득이 물리학과를 다니면서 수학을 독학하신 -당시 유일의 수학교수인 일본인 교수 ( 수치해석 전공 ) 로부터 간접적 지도를 받았다고 함-  李林學선생님은 광복과 더불어 경성대학 수학과 전임으로 부임하셨다. 선생님의 수학에 대한 애착과 열성은 대단하셨고, 그 열성은 곧 학생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초기에 대수학을 전공하려고 생각한 학생이 많았던 것도 선생님의 영향이라고 여겨진다. Journal이라고는 구경도 못하던 시대에, 어떤 한 Journal 를 입수하셔 읽으시던 중, Double Series에 관한 미해결 문제를 발견하시고, 이것을 해결하여 미국수학회의 Bulletin 에 제출하여 게재된 일이 있었다. 이 일은 수학의 불모지와 마찬가지였던   한국수학계에 큰 화재가 되기도 하였다. 선생님은 이것이 6?25 동란 중 Canada의  Univ of British Columbia로 유학 가시게 되셨고, 정년퇴임하실 때까지 그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Group Theory에서 큰 업적을 남기셨다 (일본 수학사전,  P407  I, J 참조 ) .

  


? 李林學 선생님에 대한 회고

          by 李   正   淋 (1931년 생,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 졸업, 버지니아대 Ph.D.)

                       

    李林學 선생은 1955년 벤쿠버에 있는 British Columbia 대학에서 Jennings 교수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마쳤는데 그때까지 이미 국제 학술지에 논문이 3편 발표하였고, 그 후 British Columbia 대학에 근무하였다. 1960년까지 Chevalley의 예상을 증명하는 논문을 비롯해서 모두 16편의 논문을 게재하였다. 그 중에 공저는 단 2편이며, 나머지는 모두 단독 저술이다. 내용은 주로 군론에 관한 것인데, 당시 그가 발견한 일련의 단순군을 Ree group이라 하여 아직도 여기에 관한 논문들은 세계 여러 곳에서 연구 발표되고 있다. 이로 인해서 1964년에 李林學 선생이 캐나다 Royal Society의 Fellow로 피선되는 영예를 얻었다.

   

? 1950년대에 도미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 분들의 성명, 연도 및 대학 ( 전공과목 )


이임학 : 1955년 British Columbia 대학 ( 대수학 )

임덕상 : 1957년 Indiana 대학 ( 대수기하 )

윤갑병 : 1958년 Syracuse 대학 ( 조화해석학 )

권경환 : 1958년 Michigan 대학 ( 다양체론 )

이정림 : 1959년 Virginia 대학 ( 대수적위상수학 )

장범식 : 1959년 British Columbia 대학 ( 1958년 3인 공저 논문 ) ( 대수학 )

박삼열 : 1959년 Pittsburgh 대학 ( 해석학 )

최병성 : 1961년 Berkeley에 있는 California 대학 ( Lie-대수 )

한화석 : 1961년 North Carolina 대학 ( 정수론 )

하광철 : 1961년 Illinois대학 ( 해석학 )

서태일 : 1961년 Yale 대학 ( 비가환대수 )

송기선 : 1963년 Michigan 대학 ( 해석학 )

한경택 : 1963년 Stanford 대학 ( 복소다변수함수론 )

고광일 : 1962년(?) North Carolina 대학 ( 대수학 )

곽노섭 : 1959년(?) Brooklyn 공과대학 ( 위상수학 )


Arranged by SGLee, 2008.